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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퇴근 좋아요" K-직장인이긴 마찬가지! <니얼굴> 정은혜 작가가 말하는 현생

2년차 직장인 은혜씨의 일터에는 수많은 부모들의 눈물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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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tvN

배우? 작가? 그보다 은혜씨는 ‘칼퇴’ 좋아하는 K-직장인이었다. 1990년 백말띠, 올해 33살 정은혜씨는 최근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배우 한지민과 쌍둥이 자매로 출연하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은혜씨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도 개봉했다. 이제 은혜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은혜씨를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은혜씨가 운영 중인 유튜브 채널 <니얼굴 은혜씨> 구독자는 500명에서 5만명으로, 수직 상승했다. 셀러브리티가 된 은혜씨의 일주일은 각종 인터뷰와 방송 출연, 영화 홍보 스케줄 등으로 꽉 차 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은혜씨의 일상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페이스북 친구가 2000명이 넘는 ‘인싸 중의 인싸‘이지만 과거 은혜씨는 집 안에만 콕 박혀 지내는 생활을 했다. 24살이 되어서야 그림에 재능을 발견한 은혜씨는 뒤늦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동안 그린 얼굴은 4000명이 넘는다. 현재는 ‘틈틈’이라는 작업실에서 발달장애인 동료들과 함께 월급을 받으며 예술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영화 <니얼굴>은 집콕하던 은혜씨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되기까지, 은혜씨가 자립하는 과정을 오롯이 담았다. <니얼굴> 개봉을 앞둔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씨네플레이 뉴스룸에서 정은혜 작가와 서동일 감독, 장차현실 PD를 만났다. 세 사람은 가족이다. 엄마와 아빠가 카메라에 딸을 담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히 기록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N잡러’ 은혜씨의 천직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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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굴> 메인 포스터. ⓒ영화사 진진

영화 <니얼굴>은 정은혜 작가의 노동 연대기에 가깝다. 은혜씨는 지난 2016년 8월 경기도 양평, 문호리리버마켓에서 상점을 열어 주말마다 캐리커처 그림을 그렸다. 고객 응대에도 막힘이 없었다. 돈 계산에는 다소 약한 모습이었지만,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작가님이자 사장님인 은혜씨를 닦달하지 않고 거스름돈을 제대로 내어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주었다. 은혜씨도 그런 손님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한 작품, 한 작품을 최선을 다했다.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림을 그리는 은혜씨는 졸음이 몰려올 때마다 ”정신 차려야지”라고 외치며 양볼을 쓸어내렸고 잠을 떨쳐냈다. 마켓의 인기 셀러로 등극하면서 5천원이던 은혜씨의 그림 값은 배로 뛰었다. 은혜씨는 ”사람들이 많이 오고, 사람들이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고 그러면서 많이 그렸어요. 그림 (실력)이 더 늘었죠”라고 말했다. 엄마 장차현실 PD에게도 마켓에서의 시간은 특별했다. 장차현실 PD는 ”제가 이제까지 키웠던 장애인 딸 은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 좋아하는 것,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어렸을 때부터 뜨개질이 취미인 은혜씨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뜨개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뜨개질이 취미인 은혜씨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뜨개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스튜디오 어댑터 강현욱

당시 은혜씨는 N잡러였다. <니얼굴>에서 은혜씨는 주중에는 복지관에서 청소 일을 했고, 주말에는 마켓에서 그림을 그리며 모두가 부러워할 ‘갓생’을 살았다. 복지관과의 계약이 끝난 뒤 은혜씨는 화가로 완전히 업종을 변경했는데, 장차현실 PD는 은혜씨의 확고한 의지였다고 설명했다.

2년 동안 정든 직장을 떠날 때 괜히 섭섭하진 않았을까. 은혜씨는 복지관으로 출근했던 마지막 날을 떠올리며 ”그냥 그럭저럭”이라고 말했다. 아쉬움은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는 쿨한 MZ 세대의 전형이다. 청소 노동자에서 예술 노동자로 발걸음을 떼는 은혜씨의 첫 출근길은 <니얼굴> 말미에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얼굴들이 더 있다. 은혜씨와 나란히 앉은 발달장애인 예술 노동자들이다.

2년차 K-직장인 은혜씨 ”퇴근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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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굴> 메인 예고편. ⓒ영화

″골치 아파요. 그놈의 인기가!” 은혜씨만의 유쾌한 유머와 웃음이 가득한 영화 <니얼굴>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건 은혜씨의 인간적인 매력이 전부가 아니다. 영화의 끝에는 은혜씨와 같은 발달장애인 예술 노동자들이 각자 능력과 노동을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서동일 감독은 지난 14일, <니얼굴> 언론 시사회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대한민국 사회에 예술 노동을 통한 발달장애인들의 자립 문제를 화두로 던지고 싶었다고 밝혔다.

서동일 감독
서동일 감독 ⓒ스튜디오 어댑터 강현욱

″발달장애인들이 사회적 관계를 맺기 어려운 건 사회가 언어적 소통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언어적 소통이 어려운 발달장애인들은 소통을 이어가기 힘들다. 발달장애인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비언어적 소통을 한다. 그중 가장 많이 하는 게 그림 그리는 예술 활동이다. 예술을 통해서 발달장애인들이 개인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 서동일 감독

장차현실 PD
장차현실 PD ⓒ스튜디오 어댑터 강현욱

이날 장차현실 PD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장차현실 PD는 ”(그림을 그리면서) 은혜씨가 이전 삶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존중과 평평한 시선과 관계를 경험하게 됐다. 발달장애인이 성인이 되고 나면 가족의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운이 좋게도 은혜씨는 그림을 그려 월급을 받고 있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다. 은혜씨의 취업을 행운에 비유한 것은 발달장애인들의 처참한 취업률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발표한 발달장애인 고용률은 23.2%다. 발달장애인 10명 중 8명이 일하지 못한다.

제가 사무실 가면요. 신나요. 들어가자마자 그림 그리기 준비하고. (사무실에) 빨리 가려고 (해요) 퇴근은 좋아요

은혜씨는 '사랑스럽다'는 말이 듣고 싶다고 했다.
은혜씨는 "사랑스럽다"는 말이 듣고 싶다고 했다. ⓒ스튜디오 어댑터 강현욱
작업실에서 은혜씨의 자리.
작업실에서 은혜씨의 자리. ⓒ유튜브 '틈teum-예술도 노동이다'

출근만큼 퇴근도 좋다는, 솔직한 은혜씨는 어느덧 2년차 직장인이다. 은혜씨도 대한민국 모든 직장인처럼 월급날만을 기다리는 눈치. 월급날에는 아빠 서동일 감독과 한잔 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했는데, 소주보다는 맥주를 좋아한다고 했다. 직장 동료들과도 사이가 좋다는 은혜씨는 ”다 같이 그림 그리는 게 좋아요. 저를 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며 직장 생활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은혜씨가 소속된 작업실 ‘틈틈‘은 경기도 장애인부모연대 양평지부가 운영 중인 ‘권리 중심 중증 장애인 맞춤형 공공 일자리’다. 이곳에는 은혜씨를 포함해 발달장애인 20명이 근무하고 있다. 대부분 은혜씨처럼 그림을 그리지만, 1인 시위, 캠페인 활동과 같은 권리 운동을 주로 하는 이도 있다.

‘은혜씨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일자리

‘권리 중심 중증 장애인 맞춤형 공공 일자리‘는 지난 2020년 서울특별시가 전국에서 최초로 도입했다. 헌법에 명시된 노동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들을 위해 마련된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요구받지 않고 장애인 권리 창출을 위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게 특징이다. ‘권리 중심 맞춤형 공공 일자리’를 시작한 경기도에서는 지난해 발달장애인 25명을 채용했고, 올해는 200명으로 채용 인원을 늘렸다.

근로 계약서.
근로 계약서. ⓒ유튜브 '틈teum-예술도 노동이다'
근로 계약서.
근로 계약서. ⓒ유튜브 '틈teum-예술도 노동이다'
근로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고 사인하는 은혜씨.
근로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고 사인하는 은혜씨. ⓒ유튜브 '틈teum-예술도 노동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하루에 겨우 4시간이지만 이곳은 은혜씨와 동료들에게는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일터다. 정은혜 작가는 2020년부터 참여 중이다. 참고로 각종 대외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정은혜 작가는 휴가가 아닌 장애인 권리 신장을 위한 외근 중이다. 말 그대로 ‘열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장차현실 PD는 40대가 되어서야 처음 일자리를 얻은 사람도 있다고 전했는데, 이곳은 발달장애인 가족에게도 더없는 기쁨이 되는 공간이다.

 ″장차현실 회장님은 우리 ○○이만 살린 게 아니에요. 저도 살렸고, ○○ 누나도, 할머니, 삼촌 모두를 살리셨어요. 이 아이를 둘러싼 가족의 아픔, 마음의 힘듦을 덜어주셨고, 정말 대단하신 일하신 거예요” - ‘틈틈’에 출근하는 한 발달장애인의 부모

2022년 4월 19일, 청와대 인근에서 발달장애인 부모 550여명이 삭발을 하며 발달장애인들의 권리 확대를 외쳤다.
2022년 4월 19일, 청와대 인근에서 발달장애인 부모 550여명이 삭발을 하며 발달장애인들의 권리 확대를 외쳤다. ⓒ뉴스1
'권리 중심 중증 장애인 맞춤형 공공 일자리' 확대도 이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였다.
'권리 중심 중증 장애인 맞춤형 공공 일자리' 확대도 이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였다. ⓒ뉴스1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일자리는 매년 종료되며, 평가를 거쳐 선발되어야만 다시 일을 할 수 있다. 1년 단위 계약직인 꼴이다. 이렇듯 한계가 있긴 하지만 발달장애인의 새로운 노동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는 귀하디 귀하다. 여기에는 장애인 부모들의 공이 컸다. 8할이 눈물이었다. 장차현실 PD 역시 부모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장애인부모연대 양평지부 회장을 맡고 있는 장차현실 PD는 벌써 두 차례나 삭발 투쟁에 참여했다. 머리카락을 잘라내며 요구하는 건 발달장애인이 비장애인들과 어울리며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뿐이다.

장차현실 PD와 정은혜 작가, 서동일 감독.
장차현실 PD와 정은혜 작가, 서동일 감독. ⓒ스튜디오 어댑터 강현욱
장차현실 PD.
장차현실 PD. ⓒ스튜디오 어댑터 강현욱

- 영화 <니얼굴> 초반에는 장발이셨는데, 나중에는 머리가 아주 짧아지셨어요.

= 삭발을 두 번 했어요. 지난 2018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을 때 청와대 앞에서 발달장애인 부모 209명이 동시에 머리를 밀었어요. 정부가 치매 국가책임제를 선포한 직후였는데, 치매 환자만큼이나 발달장애인 문제도 힘들다는 외침이었어요. 발달장애인 돌봄과 노동 관련 예산을 확대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었죠.

 

- 발달장애인 노동은 제대로 인정받고 있는 건가요?

= 기자님 혹시 그거 아세요? 발달장애인에게는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위법하지 않아요. 우리나라 최저임금법에는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사람”에게는 최저임금 적용을 제외한다고 적어놨죠. 작년에 장애인부모연대 양평지부에서 발달장애인 5명을 고용했을 때 6개월 동안 지급된 급여가 총 5천만원이었어요. 비장애인과 비교했을 때 확실한 차이가 있죠?

 

- 전혀 몰랐던 사실이에요.

= 잘 모르지만 진짜 중요한 게 있어요. 발달장애인 노동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가족의 경우에도 은혜씨의 삶이 바로 서지 않는다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힘들다는 걸 몸소 겪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자립에 반드시 필요한 발달장애인의 노동 문제는 발달장애인 한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삶을 살려낸다는 걸 국가가 명심해야 해요.

<니얼굴></div>의 주인공들.
<니얼굴>의 주인공들. ⓒ스튜디오 어댑터 강현욱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세 가족은 장애인 예술 관련 홍보대사 위촉식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마냥 기쁜 일은 아니었다. 장차현실 PD는 씁쓸한 얼굴로 ”그렇게 도와달라고 할 때는 쳐다도 보지 않더니”라고 말했다. 수많은 은혜씨들이 매일 겪고 있을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발달장애인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뜯어고쳐야 하는 건 법과 제도뿐일까. 발달장애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바로잡을 것들이 많다. 장차현실 PD는 발달장애인을 향하는 ”예의 없는 관심”을 거두어달라고 당부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면 원치 않는 시선과 말이 은혜씨에게 쏟아진다. 발달장애인들에게 예의를 갖춰줬으면 좋겠다. 다운증후군 특징상 외모가 어려 보인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성인이 된 은혜씨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한다. 저희가 꼬박꼬박 ‘은혜씨’라고 부르는 이유다. 마땅한 대접을 해줘야 이들의 인격을 지킬 수 있다” - 장차현실 PD

 

허프포스트/씨네플레이 도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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